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Jean Paul Sartre'.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모습이다. 


철학자이면서 작가였던 그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했던 인물인데, 


그가 남긴 명제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이다.  

 

 


학교라는 공간은 학생에게 우수한 성적을 요구한다. 


그리고 학생은 그 공간 속에서 공부를 잘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때 말하는 공부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정규 교과 과정에 대한 공부다. 


이처럼 학생이란 존재는 학교의 교과 과정을 잘 익히고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학생"이란 존재는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을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라고 규정이 되어 있다는 

것. 이 규정을 어긴 존재는 문제가 된다. 그래서 처벌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선택을 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고민과 선택의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삶의 방향을 규정한다는 것. 


이것은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애초에 학교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도 있을 수 있고, 


공부가 적성이 아닌 아이도 있을 수 있다. 


또 공부라는 것이 학교의 교과 과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를 못 한다고 해서 


'공부'라고 하는 것 자체를 못 하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스스로 그의 본질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신을 세계에 던지고 그 속에서 시달리며 몸부림치고 그리하여 서서히 그 자신을 정의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또 어떤 기관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존재의 본질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우연한 계기로 태어나고 살아가게 될 뿐이다. 즉 실존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 존재에게 본질이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스스로 창조해야 할 일종의 과제이다. 


내가 중학교 때 만난 한자 전문가 친구는 


그 자신에게 있어 '한자'라는 것 자체가 흥미롭고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매진했고 그런 결과로 우수한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 친구가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창조한 결과이며, 


그 결과로 '한자를 잘 하는 존재'라는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정의가 학교에서 추구하는 것과 충돌이 났고 그래서 체벌이 가해졌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말하는 학생들의 본질, 즉 그들 존재의 규정은 옳은 것인가?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로 다르며 다양한데, 


그런 획일적인 규정의 기준으로 본질화 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우연을 겪는다. 


내가 선택한 결과로 여기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우연히 여기 태어났다. 


여자로 태어날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않았고, 남자가 될 것이라고 자체 판단하지도 않았다. 


태어나고 보니 여기이고 남자이며 여자인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이 시대에 속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연으로 주어진다.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 자유를 가지며, 


그 자유로움 속에서 본질을 만들어 가면 된다. 


이를 돕는 교육 기관이 다양하게 있으면 되는 것이지 


획일화 된 기준을 강요하는 폭력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인간의 삶이 본질보다 앞서 있다는 얘기다.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가지기 위해 우리가 겪어야 하는 혼란과 방황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필요한 것이지 이를 애초부터 겪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는 잘못이다. 

개인의 본질은 국가의 교육 기관이 만들어서 넣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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