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문제 깜지 안쓰고 버티다가 그럼 좀 의미있는 과제를 내주겠다고 말씀하신 담임 선생님

중구난방 문제 중구난방 답변. 난 귀납과 연역을 제일 못하는데. 수학사 관심없는데..


1.<귀납과 연역>

사전에 따르면 연역이란 하나의 전제로부터 개별적인 명제들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고, 

귀납이란 개별적인 여러 사례로부터 하나의 명제를 도출해 내는 방식이다. 

또 수학에서 연역적인 방식이란 어떤 확실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개별적인 사실들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공리와 같은 전제를 이용해서 연역적으로 다른 정리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전제 'P이면 q이다'에서


1. <P가 아니면 q가 아니다.>

2. <q이면 P가 아니다.>

3. <q가 아니면 P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제에서 여러 가지의 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또한 삼단논법도 연역의 영역에 포함된다. IT쟁이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런 것이다.


1. <조건문을 사용해서 입력받은 수가 홀수면 *를 찍는다>

2. <입력받은 수는 3이다>

3. <*이 출력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될 수 있겠고, 

귀납은 어떤 지식이나 데이터를 많이 모아, 그들 사이에 성립되는 일반적 성질을 찾아내어 

공통의 무언가를 얻어내는, 즉 새로운 지식을 도출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1. <뱀은 알을 낳는다. >

2. <개구리도 알을 낳는다.>

3. <뱀과 개구리는 파충류다.>

4, <파충류는 알을 낳는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았다. 

타당성이 증명된 사실(뱀과 개구리:파충류)를 통해 공통되는 데이터 속에서 새로운 결론을 얻는 방법이다. 

이것을 IT와 연관지어 생각해본다면


1. <자바에서 Integer클래스를 사용하고 싶을 땐 import를 굳이 안해도 된다.>

2. <Double클래스도 import를 쓰지 않고 사용이 가능하다>

3. <Integer와 Double은 lang package에 속해있다..>

4. <lang package에 들어있는 클래스를 사용할 땐 import를 안 시켜줘도 사용이 가능하다>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있다. 

사실 IT에서 귀납적인 사고는 많이 사용되지만, 많은 위험 부담이 있다. 

수없이 많은 예외들이 발생하는 프로그램에서 ‘변하지 않는 확실한 지식’이란

 절대로 단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A 클래스와 B 클래스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IT의 공리를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연역적인 방식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새로운 프레임워크나 라이브러리를 창조할 수 는 있어도, 

귀납적인 프로그래밍은 구글링으로 얻은 남의 코드를 분석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데이터에 있어서는 귀납적 사고방식은 큰 도움이 된다. 

요즘 빅데이터 열풍이 뜨겁다. 작년 미국대선에서, 오바마는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1. <SNS에서 육아 복지문제를 호소하는 사람은 워싱턴주 사람이다>

2. <블로그에서 불합리한 노인 복지를 비판하는 사람의 거주지는 워싱턴주다>

3. <워싱턴주에는 효율적인 복지 개선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등의 인터넷 서비스에서 추출할 수 있는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개개인에 맞춘 공약을 펼친 것은 아마 그의 지지율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역적인 방식은, IT나 수학에 있어서는 그런 연역적인 방식을 통해

충분히 새로운 지식(아까 말한 프레임워크나 라이브러리, 새로운 언어 등등)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문제는 실제 세계에 관해서, 

연역적인 방식이 과연 실제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느냐는 장담할 수 없다. 

수학의 세계는 실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에.. 

확실성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보장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현실 세계에서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지식‘이란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연역적으로 지식을 도출하려고 하면 

확실한 전제는 과연 존재하나?’라는 벽에 부딪히게 되며, 

결국 사람들은 관찰과 경험을 통한 제한적인 전제로부터 제한적인 지식들을 도출할 뿐이다. 

그런데 그 전제 자체는 이미 관찰과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대부분의 지식도출 과정은 철저히 귀납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완벽한 연역적 지식이란, 순수한 사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다. 

과연 그것은 현실에 존재할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초자연적인 것이나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들은.. 

순수한 진리만이 존재하는 영역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존재는 과학이라는 걸림돌로 인해,

사실 ‘지식’이라는 존재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사실적으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지식은 결국 

귀납적 영역에 의존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원시시대부터 우리는 귀납이라는 사고방식을 통해 공리를 추출해왔을 것이다.

 

2.<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괴델은 대표적인 수학적 플라톤주의자였다. 

청년시절부터 플라톤주의에 심취된 괴델에게 

수학은 객관적인 수학적 실체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수단이었고, 

그의 증명은 수학을 이해하는 우리의 마음이 인간이 구축한 체계의 한계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실체에 이르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괴델의 플라톤주의는 당시의 수학, 철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젊은 시절 괴델은 철학자 슐리크가 중심이 된 비엔나 서클의 일원이었는데, 

이는 비트겐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에게 명제란 그 명제를 참이 되게 하는 경험들의 총체를 뜻하는 것으로써 

어떤 명제의 의미는 오직 경험적 검증수단에 의해 주어질 뿐이었고, 

이는 괴델의 선험적(?)이고 관념적 실체에 대한 신념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평생을 통해서 오직 수학적 증명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자 했던 괴델은 

자신을 온통 둘러싸고 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관점에 대한 반박과 부정이자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불완전성정리로 표출했을 지도 모른다.

이는 특히 자신의 신념과는 정 반대되는 주장으로.. 

비엔나 서클 멤버들에게 카리스마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정면대응이었다고 여겨진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는 아래와 같이 서술된다.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든 참이면서도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따라서 

수론에 적합한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은 불완전성정리를 통하여, 

인간이 가장 정교한 법칙에 따라 진행하는 사고과정인 수학에서도 

우리는 기존의 경험만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진리발견의 과정을 동원해야 함을 말하면서 

인간의 모든 사고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규칙전개로 보는 견해의 한계를 보여줬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독일을 뛰쳐나온 괴델은 아인슈타인이 재직하던 

프린스턴의 고등과학원에 정착하고 

그 곳에서 자신보다 한 세대 위의 아인슈타인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된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그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각자의 연구 분야가 인간적 투영에 종속되지 않는 객관적 실체이고 

또 우리의 생각에 무관한 절대적이고 독립적 존재일 것이라는 초신념을 가졌다는 점이다. 

상대성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것과 달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의 객관적 본질을 묘사하는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의 확률론적 본질, 즉 위치와 속도 등의 기본 요소를 

순수하게 분리해 낼 수 없다는 점을 못마땅해 했고, 

우리가 보든 말든 ‘저 밖에’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상보성이라 불리는 보어의 입자-파동 이중성 이론 및 코펜하겐 해석을 

극단적으로 불신, 혐오했다.

이상의 내용은 예전에 읽었던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도 나왔던 내용이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과 괴델. 상당히 엇비슷한 관계다. 

독일에서는 이 당시 꽤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역시 지루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공리와 정의를 가지고, 증명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수학의 개념과는 너무나 다르다. 

괴델 이전의 사람들은 모든 참인 명제는 증명 가능하다라고 믿고 있었다. 

괴델의 불완전성은 ‘수학이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이 아니고, 닫힌 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어떠한 수학체계에서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 

결국 수학은 무한히 발전한다는 뜻인 것 같다.

나는 딱히 관심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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