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index.html 파일의 body 태그를 구성한다.

--------------------------------------------------------------------

<body>

<div>

<form id="insert_form">

<fieldset>

<legend>데이터 추가</legend>

<table>

<tr>

<td><label>상품명</label></td>

<td><input type="text" name="name" /></td>

</tr>

<tr>

<td><label>모델 번호</label></td>

<td><input type="text" name="modelnumber" /></td>

</tr>

<tr>

<td><label>시리즈</label></td>

<td><input type="text" name="series" /></td>

</tr>

</table>

<input type="submit" value="추가" />

</fieldset>

</form>

</div>

<table id="output" border="1">

</table>

</body>

--------------------------------------------------------------------

그럼 화면 상으로는 이렇게 출력이 된다




이젠 head 태그를 구성한다. 다음과 같이 jQuery를 추가한다.

데이터를 가져오고 추가하는 부분만 만들 것이므로, 

데이터를 보여주는 함수와 입력 양식에 이벤트를 연결한다.

--------------------------------------------------------------------

<head>

<meta charset="UTF-8">

<title>Ajax Sample</title>

<script

src="http://ajax.googleapis.com/ajax/libs/jquery/1.6.4/jquery.min.js"

type="text/javascript"></script>

<script>

$(document).ready(function() {

//데이터를 보여주는 함수

function selectData() {

//#output내부의 내용물 제거

$('#output').empty();


//Ajax 수행

$getJSON('/products', function(data) {

$(data).each(function(index, item) {

var output = '';

output += '<tr>';

output += ' <td>' + item.id + '</td>';

output += ' <td>' + item.name + '</td>';

output += ' <td>' + item.modelnumber + '</td>';

output += ' <td>' + item.series + '</td>';

output += '</tr>';

$('#output').append(output);


});

});

}

//데이터 추가

$('#insert_form').submit(function(event) {

//Ajax 수행

var data = $(this).serialize();

$.post('/products', data, selectData);

//기본 이벤트 제거

event.preventDefault();

});


//초기 화면에 데이터 표시

selectData();

});

</script>


</he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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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Applicaition은 단계별로 웹 서핑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어야한다.

Spring Web Flow는 미리 정해진 흐름을 따를 수 있도록 각 요소들을 개발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어떤 프레임워크를 이용하든지 미리 정해진 흐름을 따르는 애플리케이션을 작성할 수 있다.

스프링 웹 플로우는 흐름 기반 웹 애플리케이션을 위한 스프링 MVC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스프링 웹 플로우가 스프링의 서브프로젝트이긴 하지만 스프링 프레임워크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스프링 웹 플로우를 프로젝트의 클래스패스에 추가해야함

다운로드 : http://projects.spring.io/spring-webf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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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Jean Paul Sartre'.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모습이다. 


철학자이면서 작가였던 그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했던 인물인데, 


그가 남긴 명제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이다.  

 

 


학교라는 공간은 학생에게 우수한 성적을 요구한다. 


그리고 학생은 그 공간 속에서 공부를 잘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때 말하는 공부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정규 교과 과정에 대한 공부다. 


이처럼 학생이란 존재는 학교의 교과 과정을 잘 익히고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학생"이란 존재는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을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라고 규정이 되어 있다는 

것. 이 규정을 어긴 존재는 문제가 된다. 그래서 처벌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선택을 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고민과 선택의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삶의 방향을 규정한다는 것. 


이것은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애초에 학교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도 있을 수 있고, 


공부가 적성이 아닌 아이도 있을 수 있다. 


또 공부라는 것이 학교의 교과 과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를 못 한다고 해서 


'공부'라고 하는 것 자체를 못 하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스스로 그의 본질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신을 세계에 던지고 그 속에서 시달리며 몸부림치고 그리하여 서서히 그 자신을 정의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또 어떤 기관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존재의 본질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우연한 계기로 태어나고 살아가게 될 뿐이다. 즉 실존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 존재에게 본질이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스스로 창조해야 할 일종의 과제이다. 


내가 중학교 때 만난 한자 전문가 친구는 


그 자신에게 있어 '한자'라는 것 자체가 흥미롭고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매진했고 그런 결과로 우수한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 친구가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창조한 결과이며, 


그 결과로 '한자를 잘 하는 존재'라는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정의가 학교에서 추구하는 것과 충돌이 났고 그래서 체벌이 가해졌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말하는 학생들의 본질, 즉 그들 존재의 규정은 옳은 것인가?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로 다르며 다양한데, 


그런 획일적인 규정의 기준으로 본질화 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우연을 겪는다. 


내가 선택한 결과로 여기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우연히 여기 태어났다. 


여자로 태어날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않았고, 남자가 될 것이라고 자체 판단하지도 않았다. 


태어나고 보니 여기이고 남자이며 여자인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이 시대에 속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연으로 주어진다.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 자유를 가지며, 


그 자유로움 속에서 본질을 만들어 가면 된다. 


이를 돕는 교육 기관이 다양하게 있으면 되는 것이지 


획일화 된 기준을 강요하는 폭력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인간의 삶이 본질보다 앞서 있다는 얘기다.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가지기 위해 우리가 겪어야 하는 혼란과 방황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필요한 것이지 이를 애초부터 겪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는 잘못이다. 

개인의 본질은 국가의 교육 기관이 만들어서 넣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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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문제 깜지 안쓰고 버티다가 그럼 좀 의미있는 과제를 내주겠다고 말씀하신 담임 선생님

중구난방 문제 중구난방 답변. 난 귀납과 연역을 제일 못하는데. 수학사 관심없는데..


1.<귀납과 연역>

사전에 따르면 연역이란 하나의 전제로부터 개별적인 명제들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고, 

귀납이란 개별적인 여러 사례로부터 하나의 명제를 도출해 내는 방식이다. 

또 수학에서 연역적인 방식이란 어떤 확실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개별적인 사실들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공리와 같은 전제를 이용해서 연역적으로 다른 정리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전제 'P이면 q이다'에서


1. <P가 아니면 q가 아니다.>

2. <q이면 P가 아니다.>

3. <q가 아니면 P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제에서 여러 가지의 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또한 삼단논법도 연역의 영역에 포함된다. IT쟁이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런 것이다.


1. <조건문을 사용해서 입력받은 수가 홀수면 *를 찍는다>

2. <입력받은 수는 3이다>

3. <*이 출력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될 수 있겠고, 

귀납은 어떤 지식이나 데이터를 많이 모아, 그들 사이에 성립되는 일반적 성질을 찾아내어 

공통의 무언가를 얻어내는, 즉 새로운 지식을 도출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1. <뱀은 알을 낳는다. >

2. <개구리도 알을 낳는다.>

3. <뱀과 개구리는 파충류다.>

4, <파충류는 알을 낳는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았다. 

타당성이 증명된 사실(뱀과 개구리:파충류)를 통해 공통되는 데이터 속에서 새로운 결론을 얻는 방법이다. 

이것을 IT와 연관지어 생각해본다면


1. <자바에서 Integer클래스를 사용하고 싶을 땐 import를 굳이 안해도 된다.>

2. <Double클래스도 import를 쓰지 않고 사용이 가능하다>

3. <Integer와 Double은 lang package에 속해있다..>

4. <lang package에 들어있는 클래스를 사용할 땐 import를 안 시켜줘도 사용이 가능하다>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있다. 

사실 IT에서 귀납적인 사고는 많이 사용되지만, 많은 위험 부담이 있다. 

수없이 많은 예외들이 발생하는 프로그램에서 ‘변하지 않는 확실한 지식’이란

 절대로 단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A 클래스와 B 클래스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IT의 공리를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연역적인 방식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새로운 프레임워크나 라이브러리를 창조할 수 는 있어도, 

귀납적인 프로그래밍은 구글링으로 얻은 남의 코드를 분석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데이터에 있어서는 귀납적 사고방식은 큰 도움이 된다. 

요즘 빅데이터 열풍이 뜨겁다. 작년 미국대선에서, 오바마는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1. <SNS에서 육아 복지문제를 호소하는 사람은 워싱턴주 사람이다>

2. <블로그에서 불합리한 노인 복지를 비판하는 사람의 거주지는 워싱턴주다>

3. <워싱턴주에는 효율적인 복지 개선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등의 인터넷 서비스에서 추출할 수 있는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개개인에 맞춘 공약을 펼친 것은 아마 그의 지지율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역적인 방식은, IT나 수학에 있어서는 그런 연역적인 방식을 통해

충분히 새로운 지식(아까 말한 프레임워크나 라이브러리, 새로운 언어 등등)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문제는 실제 세계에 관해서, 

연역적인 방식이 과연 실제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느냐는 장담할 수 없다. 

수학의 세계는 실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에.. 

확실성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보장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현실 세계에서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지식‘이란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연역적으로 지식을 도출하려고 하면 

확실한 전제는 과연 존재하나?’라는 벽에 부딪히게 되며, 

결국 사람들은 관찰과 경험을 통한 제한적인 전제로부터 제한적인 지식들을 도출할 뿐이다. 

그런데 그 전제 자체는 이미 관찰과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대부분의 지식도출 과정은 철저히 귀납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완벽한 연역적 지식이란, 순수한 사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다. 

과연 그것은 현실에 존재할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초자연적인 것이나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들은.. 

순수한 진리만이 존재하는 영역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존재는 과학이라는 걸림돌로 인해,

사실 ‘지식’이라는 존재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사실적으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지식은 결국 

귀납적 영역에 의존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원시시대부터 우리는 귀납이라는 사고방식을 통해 공리를 추출해왔을 것이다.

 

2.<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괴델은 대표적인 수학적 플라톤주의자였다. 

청년시절부터 플라톤주의에 심취된 괴델에게 

수학은 객관적인 수학적 실체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수단이었고, 

그의 증명은 수학을 이해하는 우리의 마음이 인간이 구축한 체계의 한계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실체에 이르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괴델의 플라톤주의는 당시의 수학, 철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젊은 시절 괴델은 철학자 슐리크가 중심이 된 비엔나 서클의 일원이었는데, 

이는 비트겐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에게 명제란 그 명제를 참이 되게 하는 경험들의 총체를 뜻하는 것으로써 

어떤 명제의 의미는 오직 경험적 검증수단에 의해 주어질 뿐이었고, 

이는 괴델의 선험적(?)이고 관념적 실체에 대한 신념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평생을 통해서 오직 수학적 증명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자 했던 괴델은 

자신을 온통 둘러싸고 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관점에 대한 반박과 부정이자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불완전성정리로 표출했을 지도 모른다.

이는 특히 자신의 신념과는 정 반대되는 주장으로.. 

비엔나 서클 멤버들에게 카리스마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정면대응이었다고 여겨진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는 아래와 같이 서술된다.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든 참이면서도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따라서 

수론에 적합한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은 불완전성정리를 통하여, 

인간이 가장 정교한 법칙에 따라 진행하는 사고과정인 수학에서도 

우리는 기존의 경험만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진리발견의 과정을 동원해야 함을 말하면서 

인간의 모든 사고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규칙전개로 보는 견해의 한계를 보여줬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독일을 뛰쳐나온 괴델은 아인슈타인이 재직하던 

프린스턴의 고등과학원에 정착하고 

그 곳에서 자신보다 한 세대 위의 아인슈타인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된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그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각자의 연구 분야가 인간적 투영에 종속되지 않는 객관적 실체이고 

또 우리의 생각에 무관한 절대적이고 독립적 존재일 것이라는 초신념을 가졌다는 점이다. 

상대성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것과 달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의 객관적 본질을 묘사하는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의 확률론적 본질, 즉 위치와 속도 등의 기본 요소를 

순수하게 분리해 낼 수 없다는 점을 못마땅해 했고, 

우리가 보든 말든 ‘저 밖에’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상보성이라 불리는 보어의 입자-파동 이중성 이론 및 코펜하겐 해석을 

극단적으로 불신, 혐오했다.

이상의 내용은 예전에 읽었던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도 나왔던 내용이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과 괴델. 상당히 엇비슷한 관계다. 

독일에서는 이 당시 꽤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역시 지루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공리와 정의를 가지고, 증명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수학의 개념과는 너무나 다르다. 

괴델 이전의 사람들은 모든 참인 명제는 증명 가능하다라고 믿고 있었다. 

괴델의 불완전성은 ‘수학이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이 아니고, 닫힌 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어떠한 수학체계에서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 

결국 수학은 무한히 발전한다는 뜻인 것 같다.

나는 딱히 관심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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