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개 소시민으로써 나꼼수와 그 멤버들을 지지했다


주진우기자가 물어온 사실을 '팩트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쓰고 예언이라 읽는다)로 쓰고 

그에 대해서 정치에 관해선 x도 모르는 사람까지를 위해서 

그 소설에 대해서 알기쉽게 해설해주는 정봉주와, 

팟캐스트를 들을때 더욱 맛깔나게 들으수 있게끔 편집해줬던 목아돼가 있어서 

이명박 정권 5년간을, 나를 깨어있는 지식인에는 못미치지만 

육식인에 가까운 상태로 보낼수 있게 해준 점에 대해서 감사함을 느낀다

주진우와 김어준에 대한 판결이 무죄로 남에 따라, 

그들에게 나꼼수 시즌 2를 기대해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픈점이 언론이 언론으로써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때문에

 일개 개인과 개인이 모인 나꼼수팀이 대안 언론으로써의 기능을 하게 된점과 

그들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서 해줄수 있는 일이 없다는게

(특히 정봉주가 감옥에 가 1년동안 고생하고 피선거권 10년 박탈등의 정치인으로써의 생명이 거의 끝나다시피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나꼼수시즌 2를 기대하는것만큼이나 미안한 마음이 들게한다

박근혜정권이

(국정원과 국방부와 선관위의 부당한 선거 개입과 댓글공작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가의 대통령이라고 할수 있다면)

 끝나기 전에, 그들이 나꼼수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국민들이 그들의 어깨에 짊어진 짐을 나눠 메고 힘을 합쳐서 이 사람들을 지키고 

나아가 젊은이들이 떳떳하고 당당하게 정의를 말할수있는 그런 사회를 구축할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김어준총수, 주진우기자, 정봉주 전 의원, 김용민 미래교수님

여러분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들이 하던 말 그대로

쫄지마 씨바



p.s 판사가 김환수 판사라네. 이뻐해주려했는데 알고보니 꼴통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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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힙합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인 리플러스의 두 곡을 믹스한 영상이다.

듣고 있으면 뭐라해야할까. 마음속의 구멍이 정말 구멍이 되는 느낌.

시원한 가을바람이 내 마음속 뻥 뚫린 곳을 훝고 지나가서

약간 시리기도 한데, 가슴은 뛰는.. 그런 비트와 멜로디. :)

완전히 깜깜해지기전에, 그러니까 저녁과 밤의 사이

창문을 열어놓고 군청색 하늘과 불어오는 가을 바람, 시원한 음료수 한잔과 함께 듣고 싶은 음악이다.

예전에 살던 내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야경과 함께 해도 좋을텐데..

반짝반짝거리는 주황색 불빛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그리고 졸졸 흐르는 예쁜 개울 :)



멜로우톤 앨범(작년 가을쯤 버전) 듣다가 발견한 주옥같은 샘 오크의 곡.

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적당히 메마른 비트와 대비되는 촉촉한 멜로디.

사랑을 노래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가을같은 노래,

가을 밤 나무 밑을 산책하며 사색에 잠길 때, 듣기 딱인 노래.

꽤 애절하게 들리는 곡이지만, 가사를 찬찬히 들어보면 찬란한 사랑에 대한 가사다.

반전 매력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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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바뀐다.

느낀 것 2013. 10. 16. 21:02

내가 변하는것이 옳은 것일까?

나는 왜 내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말로는 진보를 외치면서도 

정작 내 내면의 변화로 인한 혼란은 지양하는 슬픈 현실...

개인의 소신과 개인의 정의가 함께가는 변화라면?

그런데 소신을 지키면서 변화한다는 것이 쉽게 가능할까?

어른이 되가는 기분.


차고넘쳐흐른 마음이 
글이 되어 어딘가로 조각조각 떨어진다

젊은 날의 눈부심
어린 날의 서러움
나의 시간은 일분마다 천년씩 지나가고 있는데
정작 나는 열아홉에 멈춰있구나

떨어진 글과 흘러내린 마음을 품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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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참 슬픈 일은

가슴을 잘라 마음을 꺼내어 보여줄 수 없는 것이고

그보다 더 슬픈 일은 마음을 꺼내 보여주었음에도

진정 몰라주는 것이며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슬픈 것은

그것을 알고나서도 어쩔 수 없이

도로 덮어놔야하는 인연들이다. 


2.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진 않고 무슨 짓을 해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기억이란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이며

그것을 오지말라 화를 낼 수도 없다.

후회를 해도 지난 일이고 행여나 다시란 생각으로 잡아선

안될 것들을 또 다시 잡아서 스스로 또 죽음처럼 살 필요는 없다.

뻔히 보이는 앞날에 무모한 용기를 낼 필요는 없다.


3.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쳤을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하도 서러워

꼬박 며칠 밤을 가슴 쓸어 내리며 울어야 했을 때


그래도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살고 싶었을 때

어디로는 떠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


집시처럼

허공에 발을 내딛은 지난 몇달 동안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사람이 없었으며

사랑받고 싶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했으며

필요한 누군가가 나의 사랑이어야 했다


그립다는 것이

그래서 아프다는 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을

혼자가 되고부터 알았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노라

그 모질게 내뱉은 말조차 이제는 자신이 없다


긴 아픔을 가진 사람은 안다

그나마 사랑했기에

그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마저 없었을 땐

숨을 쉬는 고통조차 내 것이 아닌

빈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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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채플린의 열렬한 팬이었던 히틀러는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되었을 때, 

모든 점령국으로부터 상영을 금지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따로 입수한 위대한 독재자를 두번이나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마음을 울렸던 영화 마지막의 연설문 일부.

길지 않은 문장 속에 담겨진 아름다운 것들. 내가 갖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나라..


"미안합니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다스리고도 싶지 않습니다. 

가능한다면 모든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 흑인, 백인, 그 모든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남의 불행을 빌기 보다 행복하기를 빌고 싶습니다. "
(중략)
"급속도로 산업 발전을 이루었으나 우린 자신에게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도운 기계는 우리에게 결핍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식은 우리를 냉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생각은 많이 하면서도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별로 없습니다. 

기계보다는 인권이 중요하고 지식보다는 친절과 관용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중략)
"모두에게 일을 할 기회를, 젊은이들에게 새 미래를, 노인에게 복지 시설을 나눠줍시다. 

물론 저 극악무도한 자들도 그런 것을 약속했지만 그들은 평생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만 가능성을 줍니다. 

이제 우린 그 공약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됩니다. 

이성이 다스리는 나라, 기계를 통해 행복이 전해지는 나라를 만들어야 됩니다."

"군인들이여, 민주주의의 이름아래 하나가 됩시다!"

-위대한 독재자(1940)-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독재자는 사람들의 시대적 요구와 합하는 강력한 이슈와 끊임 없는 선동, 세뇌를 통하여

군중의 욕구를 대변하는 아바타로 태어난다.

사람들은 이 아바타에 열광하고..

결국, 인간의 욕심으로 빚은 금송아지가 탄생되는 것이다.

대중의 욕구로 만들어진 아바타는 이성없는 짐승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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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누군가에게 은촛대가 되었고, 누군가에겐 끝없는 추적과 자살이 되었고,

그들에게는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은 그들에게는 헛소리에게 불과했다. 

그들의 젊음과 열정은 삭막하고 절망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 송이 붉은 장미꽃과 같은 희망을 볼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단어가 있다. 선한자의 침묵과 선하지 못한 자의 투쟁. 

젊은 혁명군들은 혁명을 일으키기 전,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과 정의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있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 얼마나 달콤한가. 

불의에 맞선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의를 위해 청춘을 바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만이 프랑스를 뒤덮었을 때, 그들은 시민들의 불만을 발판 삼아 일어섰다. 

끊임없이 외쳤고, 거리로 나섰고, 혁명을 꿈꿨다. 그들은 믿었겠지. 

정의는 실현되리라. 국민들의 힘은 나라를 바꿀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가족을 버리고 사랑을 버렸다. 그렇게 혁명을 향한 투지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함께하기로 한 시민들은 문을 걸어 잠궜으며, 그들의 힘은 총 칼에 무너졌다. 

그들이 흔들던 깃발은 대포로 인해 찢겨졌으며, 동료의 피가 얼굴에 튀는 것을 느끼면서 죽어가야했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다. 그 곳에서 나는 내 모습을 봤던 것이다. 

이 나라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 젊은 목소리가 모이면 불의에 맞설 수 있다는 생각.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 

나는 혁명군이었고 혁명군은 내 모습이었다. 

날아오는 총알 속에서도 도망치지않고

 끝까지 자신의 정의와 보편적인 정의, 좀 더 나은 프랑스, 국민들이 행복한 프랑스를 위해 싸운 그들이었다. 

나는 그러한 모습들을 이상으로 삼았었다.

정의, 그 얼마나 위대한 단어인가. 그들은 정의를 위해 죽었다. 아니, 정의를 꿈꾸다 죽었다는 것이 옳다. 

과연 그 혁명군들은 정의 실현에 있어 도움이 되었을까? 

프랑스 근위대에게 처참히 짓밟혔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정의를 실현한 것이었다. 

죽는 순간 후회되진 않았으리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반나절을 산다 할지라도 절대 불의와 타협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처럼 총칼에 목숨을 잃는다해도, 항상 정의를 꿈꿀 것이다. 

이 책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곧이어 반동 정치가 시작되자 격렬하게 정부를 비판한다.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했지만. 

망명 중에도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발표했고 결국 벨기에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어쩌면 정부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레 미제라블’의 혁명군들은 위고의 페르소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혁명을 꿈꾸며 가슴 설레어하던 그들의 모습에게서 현재과 과거, 미래의 나를 보았다. 

이렇게 처절한 공감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숭고한 혁명군들의 피흘림 덕에 현재의 민주주의가 꽃 핀 것이다. 

나는 그 꽃의 거름이 되고 싶다. 

나의 가슴은 언제나 뛸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고 불의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어리지만 언제나 간절히 꿈꾸고 꿈꿀 것이다. 

그들이 혁명 전날 술집에 모여 다함께 의지를 다졌을 때, 그들의 감정을 나는 영원히 가슴속에 품고 살 것이다.

révolutionnaire.. 

내가 어른이 된다면, 

나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거야. 나는 한 평생 내 신념을 지켜 굴하지 않을거야.

수도 없이 다짐 했었다.

아마 대다수의 '어른이'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개인의 정의가 실현되는 그런 세상을 꿈꿨겠지?

또한 내가 비난하는 저 '어른'들중에서도 한때 나와 같았던 사람들이 있겠지.

세월이 나를 바꾸는가 내가 나의 세월을 바꾸는가

변화를 지양한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과감한 핸들 꺾기가 필요할때가 있다. 그러나 생각과 행동의 기반은 굳건해야한다.

진화와 퇴보는 종이 한장 차이..

학생신분이고 아직 어린 나는 너무 작다. 다들 못할거라고 편하게 살라고 말한다.

나도 아무 생각없이 일에만 매달리고 싶지 얼마나 편해

때려치고 조용히 살고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고나의 소신이 어설픈 치기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도 나는 나를 지킬련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혁명 하루전날.. 내가 너무 사랑하는 노래 One day more...

모든 주인공들의 마음과 입장이 한 곳에 모이고, 그 벅참.. 두근거림..

한국어 자막이 없는게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자베르의 one day more to revolution 부분이랑,

마리우스랑 코제트의 사랑노래 사이에서 

남장을 하며 부르는 에포닌의 노래가 참 좋다. 

제일 좋아하는 두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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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콘에서 just the two of us를 공연했었구나.

라이브 영상은 처음 보는데 어반자카파 원곡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원곡은 음..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은데. 깔끔하고, 리듬감 넘치는 피아노 반주.

그런데 리모콘에서는 신디 사운드로 바꾸고, 다른 악기를 넣어서 더 다이나믹하다.

just the two of us에 드럼이랑 베이스라니, 일렉이라니. 상상도 못했던! 

또 왜케 좋지ㅋㅋ 소울 충만한 연주 너무 좋다.

현아 언니 목소리에 한번 반하고 건반이랑 드럼 세션에 두번 반하고... 

빌 위더스의 just two of us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어반자카파 밖에 없음ㅎㅎ



just a feeling 이 노래만 들으면 가을날에 한강에 앉아있을 때가 떠오른다.

어떤 남자가 기타 들고와서 우리 주변에서 연주했었는데, 엄청 감성적이었어서 기억에 남는다.

가을 바람이랑 KGB랑. 좋은 친구들이랑 기타소리.. 노래로 추억하기.

기타 두대랑 목소리 3개로 이렇게 멋진 곡을 만들 수 있다니..

매년 GMF때마다 주로 어반자카파 있는 스테이지만 쫒아다녔는데, 단독 공연 한번 하면 좋겠다.

그런데 저 영상은 누가 촬영한거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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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 존스의 권총으로 빵 쏘아 죽이는 그런건
아니예요.
제 마음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죽어요.

새벽 한시 집에 도착해서 잠깐 책을 읽었다.
내가 10년째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책인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사랑을 그만 두는 것은 살기를 그만둔다는 이 엄청난 철학적인 이야기를
이 꼬마녀석은 이미 알고있고, 그건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고작 5살짜리라는 것을 굳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어쩌면 5살짜리도 아는 것을 어른이 되면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혹은 어른이 되면 외면하고 마는 것을 이 아이가 끄집어 내주는 것일까.
버스커버스커의 ‘향수’라는 노래가사 중에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고 예쁘게 표현한 가사가 있는데 
사실 그 가사는 실제 외국의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이 뭐냐고 질문하자 
대답한 명대사 중에 하나였다.
‘사랑이란 향수를 바른 한 소녀와 애프터쉐이브를 바른 한 소년이 만나서
서로의 향기를 맡는 거에요‘
그렇게 보면 5살 어린 제제의 이런 통찰과 상상은 소설 속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모두 어렸을 때 제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제는 잊어버려서 알 수 없다..

" 내가 잘 설명해주마. 그건 말이다.
네가 자랐다는 증거야.
네가 더 크면 네가 마음속으로 말하고 보는 일을 '생각'이라고 하게 된다.
너도 생각을 갖게 된 거야 "

" 그럼 철이 든다는 말씀이세요? "

"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 땐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생각이 자라고 자라서 네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는 거야.
그때는 네 눈이 다시 뜨여 인생을 아주 새롭게 보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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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스릴러나 SF, 액션을 즐겨보는 터라 잔잔한 영화는 굳이 찾아보진 않지만,

이 영화는 그냥 사랑스럽다, 

한 남자의 기타소리와 한 소녀의 발걸음소리가 거리에서 만났다.
그는 사랑을 잃었다. 사랑을 떠나보내고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소녀는 남편과 떨어져 사는 유부녀다. 그녀는 길위에 서서 그의 노래를 듣는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어떤 끌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비슷했다.
서로의 아픔과 모든 느낌을 공감하고, 비슷함에 전율을 느낀다.
음악이라는 매개체로 서로의 매력에 무섭게 빠져드는 그들..

그들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소녀의 삶에 대해 묻는 남자앞에서
남자가 알아 듣지 못하는 러시아어로 "난 당신을 사랑해"라고 대답한 소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늦은밤 망설이다 결국 소녀에게 "자고 가"라고 말한 그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감독은 이 영화에서 사랑을 격렬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닿을 듯 말듯. 조심스럽고 잔잔히..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의 결말은 무엇일까
현실을 위해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을 놓아버린 것, 사랑을 위해 현실을 버린것.
사실 우리들은, 아마도 현실을 위해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을 놓아버리는 경우가 더많다.
만약 다른 이에게 그것이 혹 배신이었을지라도, 이해 못할 것이었을지라도 
나에게 그것은 사랑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기에
나만의 비밀사랑이 되어 가슴에 새겨질 것이다.
결국 그들은 감정만 고스란히 남겨놓은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소녀와 남자의 노래를 담은 앨범은 완성되었지만 그들은 완성되지 못했다.

피아노를 치며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소녀
헤어지기 전날 불장난을 운운하며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던 소녀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만약 나였다면.

그녀가 만들어내는 피아노 선율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가. 그녀가 만드는 음악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나의 노래를 완성시켜준다.
우리가 함께하는 선율속에서 나는, 나의 노래는 점점 그의 것이 되어간다.

once.
한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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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문제 깜지 안쓰고 버티다가 그럼 좀 의미있는 과제를 내주겠다고 말씀하신 담임 선생님

중구난방 문제 중구난방 답변. 난 귀납과 연역을 제일 못하는데. 수학사 관심없는데..


1.<귀납과 연역>

사전에 따르면 연역이란 하나의 전제로부터 개별적인 명제들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고, 

귀납이란 개별적인 여러 사례로부터 하나의 명제를 도출해 내는 방식이다. 

또 수학에서 연역적인 방식이란 어떤 확실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개별적인 사실들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공리와 같은 전제를 이용해서 연역적으로 다른 정리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전제 'P이면 q이다'에서


1. <P가 아니면 q가 아니다.>

2. <q이면 P가 아니다.>

3. <q가 아니면 P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제에서 여러 가지의 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또한 삼단논법도 연역의 영역에 포함된다. IT쟁이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런 것이다.


1. <조건문을 사용해서 입력받은 수가 홀수면 *를 찍는다>

2. <입력받은 수는 3이다>

3. <*이 출력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될 수 있겠고, 

귀납은 어떤 지식이나 데이터를 많이 모아, 그들 사이에 성립되는 일반적 성질을 찾아내어 

공통의 무언가를 얻어내는, 즉 새로운 지식을 도출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1. <뱀은 알을 낳는다. >

2. <개구리도 알을 낳는다.>

3. <뱀과 개구리는 파충류다.>

4, <파충류는 알을 낳는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았다. 

타당성이 증명된 사실(뱀과 개구리:파충류)를 통해 공통되는 데이터 속에서 새로운 결론을 얻는 방법이다. 

이것을 IT와 연관지어 생각해본다면


1. <자바에서 Integer클래스를 사용하고 싶을 땐 import를 굳이 안해도 된다.>

2. <Double클래스도 import를 쓰지 않고 사용이 가능하다>

3. <Integer와 Double은 lang package에 속해있다..>

4. <lang package에 들어있는 클래스를 사용할 땐 import를 안 시켜줘도 사용이 가능하다>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있다. 

사실 IT에서 귀납적인 사고는 많이 사용되지만, 많은 위험 부담이 있다. 

수없이 많은 예외들이 발생하는 프로그램에서 ‘변하지 않는 확실한 지식’이란

 절대로 단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A 클래스와 B 클래스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IT의 공리를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연역적인 방식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새로운 프레임워크나 라이브러리를 창조할 수 는 있어도, 

귀납적인 프로그래밍은 구글링으로 얻은 남의 코드를 분석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데이터에 있어서는 귀납적 사고방식은 큰 도움이 된다. 

요즘 빅데이터 열풍이 뜨겁다. 작년 미국대선에서, 오바마는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1. <SNS에서 육아 복지문제를 호소하는 사람은 워싱턴주 사람이다>

2. <블로그에서 불합리한 노인 복지를 비판하는 사람의 거주지는 워싱턴주다>

3. <워싱턴주에는 효율적인 복지 개선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등의 인터넷 서비스에서 추출할 수 있는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개개인에 맞춘 공약을 펼친 것은 아마 그의 지지율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역적인 방식은, IT나 수학에 있어서는 그런 연역적인 방식을 통해

충분히 새로운 지식(아까 말한 프레임워크나 라이브러리, 새로운 언어 등등)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문제는 실제 세계에 관해서, 

연역적인 방식이 과연 실제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느냐는 장담할 수 없다. 

수학의 세계는 실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에.. 

확실성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보장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현실 세계에서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지식‘이란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연역적으로 지식을 도출하려고 하면 

확실한 전제는 과연 존재하나?’라는 벽에 부딪히게 되며, 

결국 사람들은 관찰과 경험을 통한 제한적인 전제로부터 제한적인 지식들을 도출할 뿐이다. 

그런데 그 전제 자체는 이미 관찰과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대부분의 지식도출 과정은 철저히 귀납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완벽한 연역적 지식이란, 순수한 사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다. 

과연 그것은 현실에 존재할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초자연적인 것이나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들은.. 

순수한 진리만이 존재하는 영역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존재는 과학이라는 걸림돌로 인해,

사실 ‘지식’이라는 존재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사실적으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지식은 결국 

귀납적 영역에 의존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원시시대부터 우리는 귀납이라는 사고방식을 통해 공리를 추출해왔을 것이다.

 

2.<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괴델은 대표적인 수학적 플라톤주의자였다. 

청년시절부터 플라톤주의에 심취된 괴델에게 

수학은 객관적인 수학적 실체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수단이었고, 

그의 증명은 수학을 이해하는 우리의 마음이 인간이 구축한 체계의 한계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실체에 이르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괴델의 플라톤주의는 당시의 수학, 철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젊은 시절 괴델은 철학자 슐리크가 중심이 된 비엔나 서클의 일원이었는데, 

이는 비트겐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에게 명제란 그 명제를 참이 되게 하는 경험들의 총체를 뜻하는 것으로써 

어떤 명제의 의미는 오직 경험적 검증수단에 의해 주어질 뿐이었고, 

이는 괴델의 선험적(?)이고 관념적 실체에 대한 신념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평생을 통해서 오직 수학적 증명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자 했던 괴델은 

자신을 온통 둘러싸고 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관점에 대한 반박과 부정이자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불완전성정리로 표출했을 지도 모른다.

이는 특히 자신의 신념과는 정 반대되는 주장으로.. 

비엔나 서클 멤버들에게 카리스마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정면대응이었다고 여겨진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는 아래와 같이 서술된다.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든 참이면서도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따라서 

수론에 적합한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은 불완전성정리를 통하여, 

인간이 가장 정교한 법칙에 따라 진행하는 사고과정인 수학에서도 

우리는 기존의 경험만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진리발견의 과정을 동원해야 함을 말하면서 

인간의 모든 사고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규칙전개로 보는 견해의 한계를 보여줬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독일을 뛰쳐나온 괴델은 아인슈타인이 재직하던 

프린스턴의 고등과학원에 정착하고 

그 곳에서 자신보다 한 세대 위의 아인슈타인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된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그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각자의 연구 분야가 인간적 투영에 종속되지 않는 객관적 실체이고 

또 우리의 생각에 무관한 절대적이고 독립적 존재일 것이라는 초신념을 가졌다는 점이다. 

상대성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것과 달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의 객관적 본질을 묘사하는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의 확률론적 본질, 즉 위치와 속도 등의 기본 요소를 

순수하게 분리해 낼 수 없다는 점을 못마땅해 했고, 

우리가 보든 말든 ‘저 밖에’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상보성이라 불리는 보어의 입자-파동 이중성 이론 및 코펜하겐 해석을 

극단적으로 불신, 혐오했다.

이상의 내용은 예전에 읽었던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도 나왔던 내용이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과 괴델. 상당히 엇비슷한 관계다. 

독일에서는 이 당시 꽤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역시 지루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공리와 정의를 가지고, 증명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수학의 개념과는 너무나 다르다. 

괴델 이전의 사람들은 모든 참인 명제는 증명 가능하다라고 믿고 있었다. 

괴델의 불완전성은 ‘수학이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이 아니고, 닫힌 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어떠한 수학체계에서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 

결국 수학은 무한히 발전한다는 뜻인 것 같다.

나는 딱히 관심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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